기와지붕이 멋들어진 구둣가게
베스티스컴퍼니 대표 황재환

통의동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한옥을 개조한 구둣가게가 보인다. 동양의 한옥과 서양 남자들이 즐겨 신던 구두의 조화. 베스티스컴퍼니 황재환 대표의 개성과 철학으로 점철된 구둣가게 팔러다.

#PEOPLE
빛 과장과 소금 상무, 숨은 보석을 찾아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생은 행복하다. 남성 하이엔드 슈즈 편집숍 팔러의 황재환 대표가 그렇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탓에 성인이 되기까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살던 그는 직장을 다니던 30대 초반 ‘내가 이 일을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이걸 하면 행복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뭘 해도 어차피 내 일처럼 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라는 아내의 응원에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친구와 창업을 준비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자는 뜻에서 서로를 빛 과장, 소금 상무로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빛 과장과 소금 상무는 함께 5개월 남짓 준비 끝에 남성 패션을 전문으로 하는 ‘바버숍’ 웹사이트를 열었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저는 옷이나 신발, 액세서리를 살 때 남들이 많이 입는 브랜드에는 흥미를 못 느꼈어요. 내가 사고 싶은 아이템에 대한 역사 이야기, 만듦새, 소재, 뭐 이런 것들이 설득돼야 구입했지요. 그런 걸 충족하려다 보니 우리나라에는 없는 걸 찾게 되더라고요. 2006년쯤인가 지금처럼 직구나 전자상거래 같은 건 없던 때였는데 저는 해외에서 옷이나 신발을 샀어요. 마음에 드는 제품이 나타나면 해외 유명 메이커여도 무작정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또 친절하게 답장이 와서 정보를 알려주고…. 뭐 그런 식으로 일찍 경험했던 것이 창업에 큰 도움이 됐지요.”

구두에 어울리는 패션까지 토털 코디네이션을 조언해주는 팔러.

바버샵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니크한 가치의 옷을 판매했고 매니아층이 생기면서 3년 후에는 오프라인 매장도 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번엔 구두로 눈을 돌렸다. 구두 역시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전통적인 것으로 엄선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브랜드의 구두를 찾아 해외를 누볐다. 그리고 서촌에 가장 우리스럽다는 한옥을 개조해 매장을 열었다. 그러나 4~5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때 황 대표는 의류와 달리 구두는 사치품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값싼 시계나 명품 시계 모두 기능은 비슷해도 브랜드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듯이 구두 역시 브랜드가 중요했다. 20여 가지 남짓 희귀한 브랜드만 다루던 팔러는 다시 변화를 시도했다. 지금은 국내 유일의 브랜드뿐 아니라 알든, R.M 윌리엄스, 버윅, 그라바티, 샌더스 등등 이국적이면서도 다양한 브랜드의 슈즈로 가득하다.

통의동 골목 안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팔러 외관.

# SKILL
우아한 남성들의 살롱을 꿈꾸다

팔러는 해외 브랜드 구두를 수입해 판매하기도 하지만 직접 기획·디자인한 구두도 있다. 팔러의 구두 제작 과정은 글로벌하다. 신발을 만들 때 중요한 족형을 한국인에게 잘 맞도록 디자인한 후 영국에서 족형을 만든다. 족형이 완성되면 다시 한번 다듬어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족형을 보내 샘플링을 한다. 해외 브랜드의 장인이 직접 만들되 한국인에게는 편안한 신발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팔러의 실내는 나무를 주재료로 한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풍이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남성화를 추구합니다. 클래식 남성화의 디자인은 이미 100년 정도 전에 완성된 셈이에요. 그 완성된 디자인을 조합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인의 발에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팔러만의 취향이 담긴 구두를 만듭니다.”
황 대표는 해외 7개 브랜드의 한국 독점권을 갖고 있어서 백화점에 공급하는 일도 하고 있다. 팔러에서는 전문적인 스태프의 조언을 받아 고객의 상황에 맞는 구두를 고를 수 있다. 황 대표는 팔러가 고객에게 구두만 파는 곳이 아닌 사랑방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랐다.
“팔러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사랑방 같은 개념이에요. 남자들이 다이닝 룸에서 식사한 후 팔러라는 공간에 모여 담소도 나누고 차를 마시거나 위스키를 한잔하는 그런 공간이에요. 저는 이 공간이 고객들에게 그런 의미로 가닿기를 바랐어요.”

팔러에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구두가 많다.

하루에 단 세 명의 남자에게 팔러의 구두를 선보일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생각했지만, 기대보다 그의 바람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없애고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벽면 가득 찬 구두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전문 구두 매장의 느낌이 나도록 인테리어를 바꿨다. 매장 안의 거울을 바꾸고 구두를 전시할 선반과 박스 등은 직접 그렸다. 팔러 곳곳에는 그렇게 그의 땀이 스며 있다. 코로나19도 팔러에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클래식한 구두만 판매했으나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재택근무가 늘면서 양복을 입는 사람이 줄었다. 편안한 복장을 즐기는 남성들을 위해 올해부터 샌들도 선보이고 있다.

# SPACE
한옥, 우리 안의 힙(Hip)한 매력을 끌어올리다

마당은 사과나무와 항아리 등을 이용해 보는 재미와 계절감을 더했다.

1928년에 지어진 한옥을 개조한 팔러 매장은 황재환 대표의 안목이 그대로 담겨 있다. 예스러우면서도 트렌디함이 공존한다.
“해외에 가보면 100년, 200년 된 오래된 건물에 현재가 입혀져 있는 것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게 진짜 같았죠. 우리에게 진짜는 뭘까? 생각했는데 그게 한옥이었어요. 팔러의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면서 남들과는 다른 공간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가구도 전부 다 덴마크에서 공수했습니다. 쓰레기통부터 카펫까지 다 공수한 거예요. 그렇게 차별성을 두려고 노력했습니다.”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 등으로 가득 찬 팔러 매장.

그는 개조할 때 두 가지를 고려했다. 하나는 구두를 보관할 창고가 넉넉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릴 것. 그렇게 만들어진 팔러의 실내 공간은 나무를 주재료로 한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처음 팔러가 문을 열 때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다. 황 대표는 근대시대 우리나라 초창기 살롱인 낙랑파라 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여기서 파라가 바로 팔러다. 응접실처럼 편안하고 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가정집 느낌이 나도록 꾸몄다. 지금보다 가구도 많았고 편안한 의자를 여기저기 놓았다. 마당에는 항아리를 두고 여름이면 부레옥잠을 키우기도 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라는 노래 구절이 떠올라 사과나무도 심었다.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어 종로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팔러는 골목 안에 있어서 찾아오기가 쉽지 않고 주차도 어려워요. 하지만 한옥의 분위기가 멀리 찾아오는 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특히 바로 옆에 있는 한옥 사무실은 처음 오는 분들 대부분이 대문을 열면 먼저 탄성부터 낼 정도로 매력적이에요.”
팔러 사무실은 원래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행랑채와 안채가 따로 있을 정도로 넓고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게스트하우스였기 때문에 방마다 화장실과 부엌이 있어서 그걸 다 없애느라 고생은 했지만 오히려 더 옛날의 모습이 드러나며 운치가 더해졌다. 사무실, 회의실, 대표실, 스튜디오, 스페어 사무실 등등 다양한 용도의 방들이 넉넉하게 들어서 있다.

게스트하우스였던 한옥을 개조해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2012년인가 뉴욕 맨해튼의 뒷골목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미트 패킹(meat packing),  우리나라로 치면 마장동 같은 곳을 갔는데 도축장이나 푸줏간이 있던 곳이 클럽이나 편집매장으로 화려하게, 정말 힙한 곳으로 변했더라고요. 그때 느꼈던 그 느낌을 저는 이곳에서 느끼고 있어요. 물론 한옥이 그 힙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지요.”
처음 사무실을 냈던 을지로도 인쇄소와 작은 창고 같은 것들이 즐비해 맨해튼 뒷골목의 운치가 느껴져 매우 좋아했던 곳이다. 서촌을 본격적으로 발견하게 됐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희한하다였다. 알수록 새록새록 이야기가 더해지는 서촌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서촌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한옥의 원형은 최대한 살리고 빈티지한 가구로 자연스러움을 끌어냈다.

“한옥은 정말 프라이빗한 공간이에요. 마당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대문을 잠그고 이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밖에서는 알 수 없거든요. 그리고 정말 조용해요. 수리 비용이나 유지비도 많이 드는 편이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지만 원래 힙한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버샵과 팔러 모두 큰 규모로 키우지 않고 내실 있게 하겠다는 황 대표. 앞으로 여성복 매장도 고민 중이라는 그가 서촌을 대한민국 최고의 힙한 동네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글 편집부  사진 이보영  영상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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