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홍제유연’은 오래된 건축물의 지하 공간을 예술로 재생하여 미관상의 아름다움은 물론, 지역 주민의 문화생활을 확대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2021년도 iF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홍제유연’의 물길을 따라 걸어본다.
‘홍제유연’ 초입에서 바라본 유진상가와 내부 순환로 풍경
50년 만에 막힌 물길이 열리다
지난 2019년, 홍제천 산책로 11km 중 유일하게 단절되어 있던 구간이 이어졌다. 홍제천 위 유진상가(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484)로 인해 막혔던 구간이 50년 만에 개통된 것이다. 유진상가는 1970년대 초 홍제천을 복개한 인공 대지 위에 지은 주상 복합 건물이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기에 유진상가는 폭격을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일명 방공 건축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해하는 사료와 같은 유진상가는 여전히 지역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활기찬 모습을 지녔다.
폭격에 대비해 지은 유진상가의 지하 공간
유진상가 지하를 개방해 홍제천 산책길이 하나로 연결되자 지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주민들은 한결 통행하기 편리해졌고, 하천에서 유진상가와 인왕시장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내어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효과를 내게 됐다.
일상 속 전시장으로 변모한 지하 공간
예술이 흐르는 물길을 만들다
비밀스럽게 감춰졌던 지하 공간은 서울시가 주관하고, 디올림㈜이 기획 및 콘텐츠 개발, 설치물 디자인, 제작·설치, 감리 등을 총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통로의 기능을 넘어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던 지하에 예술가들이 예술의 입김을 불어 넣은 것이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공간의 이름이 ‘홍제유연’이다. 흐를 ‘유’(流)와 만날 ‘연’(緣)의 이름을 붙인 이 특별한 예술 공간은 건축물과 홍제천이라는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간다.
조선시대 억울한 사연의 여인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과거는 묻지 않았다는 치유의 이야기와 겨울에도 물이 따뜻해 만남과 교류의 장소였다는 점에 착안해 완성한 작품. 홍제유연, TEAM Co-Work, ‘온기’
홍제교 다리 아래로 들어서면 유진상가를 받치고 있는 100여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먼저 반긴다. 낮에도 어두운 지하라는 특성에 맞춰 주로 빛, 조명, 영상, 음향을 이용한 미술 작품들이 250m에 걸쳐 펼쳐진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다채로운 조명으로 눈이 즐겁고, 숲속에 와 있는 듯한 소리는 신비롭게 들린다.
홍제천과 주변 이야기를 수집해 빛의 이미지로 그린 작품. 홍제유연, 뮌, ‘흐르는 빛, 빛의 서사’(왼쪽), 숲길을 걷는 듯 빛으로 산책의 공간을 연출한 작품. 홍제유연, TEAM Co-Work, ‘숨길’
‘홍제유연’을 걷다 보면 비둘기의 갑작스러운 날갯짓이나 거미줄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아 무섭다기보다는 훨씬 활기차다. 지하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를 느끼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오감은 ‘홍제유연’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랜 세월 흘러온 홍제천 수면 위에 투영된 글자를 인지하고 읽는 체험을 제공하는 작품. 홍제유연, 윤형민, ‘SunMoonMoonSun, Um…’
미술 작품들은 홍제천 물길과 기둥, 천장, 징검다리 등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오랜 기간 감춰졌던 공간이라는 점과 유진상가의 역사적 배경이 어우러져 ‘홍제유연’은 다른 곳과 차별화된 독특한 예술 공간으로 다가온다. 지역 주민들은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미술 작품을 자연스럽게 접한다. 일부러 ‘홍제유연’을 찾은 방문객들은 이색적인 전시회를 무료로 경험하며 추억을 남긴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배로운 구슬 ‘마니’를 응용하며 1,000여 개의 메시지와 자신과 공간을 비추는 거울로 구성한 작품. 홍제유연, TEAM Co-Work + 1,000여 명의 시민, ‘홍제 마니(摩尼)차’
예술과 문화의 지하 공간을 누리다
‘홍제유연’은 쓸모없는 공간은 없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공간이 가진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시설과 콘텐츠로 단장하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살아 숨 쉬는 공간, 의미와 가치를 갖는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홍제유연’이 말해준다.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모두 갖춘 ‘홍제유연’이 어두웠던 지난 50년을 잊고, 오래도록 환하게 빛이 나는 공간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해 본다.
저녁이 찾아온 홍제천 풍경
*‘홍제유연’ 찾아가는 법: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이며, 유진상가 우측의 홍제교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는 방법과 유진상가 내부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을 이용해 갈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개방한다.
글 편집부 사진 인성욱 참고 디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