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기념
국가유공자 가족 ‘현충시설’ 방문 행사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한라는 올해도 어김없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뜻깊은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 6월 4일 국가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 잦은 비가 이어지더니 ‘임직원 현충시설 방문’ 행사가 열린 날은 어느새 하늘이 말갛게 갰다. 푸른 하늘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신록의 푸르름이 조화롭게 빛나는 날, 구매팀 정두호 프로·시흥사업소 권택연 프로·인사팀 김윤환 프로가 양재시민의숲(서울시 서초구 매헌로 99)에 모였다. 한라 국가유공자 가족을 대표해 양재시민의숲에 위치한 현충시설을 참배하기 위한 자리였다. 서울시민의 휴식을 위해 1988년 문을 연 공원에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세 명의 프로도 이 점에 놀라며 국가유공자의 가족으로서 경건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행사에 임했다.

양재시민의숲은 매헌로를 기준으로 북측과 남측으로 구분되는데, 가장 먼저 남측에 자리한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을 찾았다. 백마부대는 한국전쟁 당시 평안북도 청년들 중심으로 조직됐다. 군번, 계급, 무기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2,600여 명의 대원들이 북한군과 500여 회의 교전을 하며 수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 기간 중 552명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다. 그 소중한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묵념으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과 윤봉길의사 동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칭송하는 영웅이지만 정작 그에 대해 아는 바는 무척 적다. 기념관 방문은 윤봉길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회가 됐다. 제 1전시실에는 배움의 과정, 야학과 계몽운동가로서의 활동, 생활 유품, 저서 등을 볼 수 있다. 윤봉길의사가 쓴 시집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읽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제2전시실에서는 상하이 활동과 생활상, 한인애국단 입단, 상하이 의거, 순국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순국 당시 나이가 불과 25살. 세 명의 프로는 전시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윤봉길의사 좌상과 태극기가 있는 1층 중앙홀에서는 불꽃 같은 삶을 산 청년 윤봉길의사를 좀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AR(증강현실)·VR(가상현실) 체험, 크로마키 등 다양한 영상 체험 시설 덕분이었다. 적장을 처단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목에 걸고 오른손에 권총을, 왼손에 수류탄을 들고 의거 전 찍은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사진에 세 명의 프로가 함께했다. 90여 년 전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현충시설을 돌아보며 참석자들은 국가유공자인 자신들의 가족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진행된 현충시설 방문 행사가 작은 실천이 되었기를 기대한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한라_인터뷰_01

“역사 속 인물을 만나러 아이들과 다시 오고 싶어요!”

2012년 무렵 양재역 근처 현장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현충시설이 있었다는 걸 몰랐네요. 오늘 훌륭한 위인 정도로만 생각했던 윤봉길의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돼 뜻깊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윤봉길의사가 집을 떠나며 남겼다는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 오지 않는다)는 글귀가 인상적이였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피해를 입고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총에 맞아 생긴 팔의 흉터나 전쟁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아버지가 겪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만 했을 뿐이었거든요. 아버지도 당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없었는데 살아 계실 때 여쭤봐야겠어요. 그리고 9살, 7살 된 두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 재방문해야겠어요.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잠시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라_인터뷰_02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친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예요. 제가 두세 살 무렵 돌아가셔서 기억은 없지만, 다리에 총상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친할아버지를 접해 왔습니다. 한국전쟁 후 상이용사들이 모여 화랑용사촌에 정착할 때 대표로 기여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방산사업을 하며 상이용사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하셨다고 하니 친할아버지의 인생은 한국전쟁과 떼래야 뗄 수 없었겠구나 싶습니다. 현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셔서 해마다 한 차례씩은 찾아뵙고 있어요. 국가유공자 가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그렇기에 평소 역사 공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좋은 기회를 만났네요. 유격백마부대 충혼탑도 인상적이었고,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전시가 연대기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관람하기 좋았습니다. 사진 촬영이나 VR 등 흥미로운 체험 시설도 다양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윤봉길의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처음 알게 됐어요. 중국 상하이 시절 이전에 농민 계몽 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수년 간의 경험과 사고의 과정을 거쳐 나라를 위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갔구나 싶었습니다. 이 세상, 우연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오랜 시절부터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바쁘더라도 호국영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한라_인터뷰_03

“호국영령, 순국선열에게 잠시나마 감사한 마음을 가져봐요”

우리 가까운 곳에 시설을 잘 갖추고 가족이랑 오기에도 좋은 현충시설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일왕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사를 잘 알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 새로웠습니다. 집을 떠나올 때 아내에게 물을 달라고 했지만 목이 메어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들의 뺨을 비볐다는 대목에서 남편, 아버지로서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저도 1년 반이 된 아이를 둔 아버지라 감정이 이입됐습니다.

지난 6월 4일 국가 유공자 대상 한라인들과 서울시 서초구 소재 양재시민의숲의 현충시설을 방문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감사함을 전하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자연스럽게 경찰로 근무하던 중 쓰러져 14년간 병상을 지키다가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살갑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부자 사이였는데 평범한 삶을 함께하진 못했네요. 그날 회를 사다줄까하고 묻는 아버지에게 다른 대답을 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문드문 해보곤 해요. 아버지는 2017년 6월에 돌아가셔서 국립대전현충원에 계세요.  6월이면 찾아갔는데 작년 한라에 입사하고는 아직 못가봤습니다. 6월이 저에게는 여러 모로 의미가 크네요. 일 년 내내 기억하며 살기는 어렵겠지만 TV 등에서 얘기가 나올 때만이라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편집부 사진 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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